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순왕후(조선 영조) (문단 편집) == 평가 == 오랫동안 대중의 인식 속에는 [[정조(조선)|정조]]가 세운 업적을 몽땅 뒤집어 엎어 버리고, [[조선 왕조]]를 망친 [[벽파]]의 우두머리라는 부정적 평가가 높았다. [[이인화]]는 소설 《[[영원한 제국]]》에서 "[[임진왜란]]보다 더한 존재"였다고 혹평하기도 했으며, 맹꽁이 서당의 작가 [[윤승운]] 작가는 악마급의 인물로 묘사를 해놨다.[* 어느 정도로 심했냐면 정순왕후의 묘비 앞에서 백성들이 '''사탄''', '''마귀할멈'''이라고 부르는 컷을 그려놓을 정도였다.] 그러나 근래에 들어선 오히려 그 반작용으로 정순왕후의 높은 정치력과 업적들이 재부상하고 있다. 만화 《[[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]]》에서는 의외로 '''당대의 위기를 극복하려고 노력한 여걸'''로 매우 고평가되는 인물이며, [[박시백]] 개인도 정순왕후에 대해 상당히 호감이 있음을 밝힌 바 있다. 실록으로 실제 행적을 살피면 정순왕후에 대한 선입견이 얼마나 부당한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. [[정조(조선)|정조]]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정계에서 [[남인]]을 사실상 추방하는 '''[[신유박해]]'''를 일으킨 것도 일부 참작의 여지는 있다. 사실 신유박해 초기는 [[남인]] 및 [[시파]] 계열에 대한 정치적 공세에 가까웠기 때문에 적당히 끝날 수 있었던 요소가 많았으나, '''[[황사영 백서 사건]]'''이 일어나면서 적당히 수습할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섰다는 것도 고려되어야 한다. 오히려 정순왕후는 [[신유박해]]를 주도하기는 했으나 사태가 지나치게 커지지 않도록 제어하고 있었다. 한 예로 [[수렴청정]]할 때 [[정약용]] 등 [[남인]]을 국문하고 처벌하라는 신하들의 요구를 여러 번 묵살한 적이 있다. 수많은 사람의 목이 떨어진 [[신유박해]] 때 [[정약용]] 등 남인 핵심 인물들이 살아남은 것도 정순왕후의 덕이 크다. '''백성들의 민생에 신경을 써 비변사, 관찰사, 수령 등 통치 질서의 확립을 강조했고, 공노비를 혁파하기도 했다.''' 특히 공노비 혁파와 장용영 폐지 등은 선왕 [[정조(조선)|정조]]의 뜻을 계승했다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낸 정책이었다[* 장용영 폐지 대목에서는 선왕 정조가 장용영을 세운 뜻을 거론하면서 눈물을 보이기도 했는데, 그러면서도 [[정조(조선)|정조]]가 [[장용영]]을 임시적인 수단으로서만 활용하려고 했다는 점을 강조했다.]. 정치적으로 이전 정권과 대립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음에도 현 정권이 그 때 시작한 정책을 계속 밀고 나가는 경우는 꽤 여럿이기 때문에 이것만 봐서는 정순왕후가 反정조파라고도, 그렇지 않다고도 말하기 어렵다.[* 대개 '장용영 혁파=정조 치세 부정'이라는 논리는 "5군영 위주의 군권을 가진 [[노론]] [[벽파]]가 군권 전체를 장악하려는 의도"로 해석한다. 박시백은 정말 군권 전체를 장악하려 했다면 그냥 장용영의 대장을 [[벽파]] 인물로 박아두면 된다며, 실제로 정조도 훈련대장에 홍국영 하나 앉혀서 군권을 장악한 바가 있다고 반박하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.] 규장각 축소도 마찬가지로, [[정조(조선)|정조]] 말기의 규장각은 이미 과거 [[세종(조선)|세종]] 시기의 [[집현전]] 수준을 넘어서 [[승정원]]과 6조의 업무까지 관여하는 등 그 권한이 비대해져서 축소가 불가피했다. 장용영이나 규장각의 부작용은 [[남인]]인 [[정약용]]조차 인정할 정도였다. 정순왕후가 '여군'(女君), '여주'(女主)로 칭했다는 것을 두고 스스로 여인 군주를 자처했다는 소리가 나오기도 한다. 사실 이런 표현은 동양의 [[왕후]]들이 사용하던 용어로 [[수렴청정]]을 했던 [[조선]]의 다른 [[대비]]들도 다 사용한 용어였다. 정순왕후는 [[벽파]]의 영수인 [[심환지]]를 [[영의정]]으로 임명했으나, [[벽파]] 일변도의 정치만을 편 것도 아니었다. [[소론]] 계열인 이시수, 이병모 등의 대신들은 [[신유박해]]에서도 무사했고 영의정, 병조판서 등 요직을 역임했으며, 특히 [[시파]]의 [[김조순]]을 차기 국구로서 적극 우대했다. 오히려 이 맥락에서, 정순왕후가 [[김조순]]을 숙청하지 않아 [[세도정치|세도 정치]]를 불러왔다라는 이상한 비판도 나온다. 그러나 이는 정조의 결정을 뒤집지 않은 것일 뿐 실책이라 보긴 애매하다. [[김조순]]은 [[노론]]의 핵심 가문이었으며, 계속 조용하게 처신하고 다녀서 조정의 경계를 별로 안 받았고 이러니 정순왕후가 [[김조순]]을 싫어할 이유도 없었다. 자세한 것은 [[김조순]] 문서 참조. 장용영 폐지건과 관련해 보면 묘한 것이, 아직 국구도 되지 않은 [[김조순]]을 불러다 장용영 대장에 앉힌 사람이 정순왕후였다. 정순왕후가 [[김조순]]과 [[장용영]]을 자신의 반대 세력으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중요한 증거이다. [[세도정치|세도 정치]]가 발생하게 된 배경에는 기존의 붕당 정치 체제를 뿌리부터 파괴한 [[영조]]와 [[정조(조선)|정조]]의 책임이 훨씬 크다는 것이 일반적 평가다. 즉, [[세도정치|세도 정치]]의 책임을 단순히 정순왕후에게만 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. 거슬러간다면 '''[[숙종(조선)|숙종]]이 [[환국(조선)|환국]]을 남용하며 조선 붕당의 건전성을 통째로 날려버렸고, [[영조]]가 [[풍산 홍씨]]를 의도적으로 양성함으로써 [[세도정치|세도 정치]]의 씨앗을 뿌렸으며, [[정조(조선)|정조]]는 기껏 척신을 청산하고 제대로 된 [[붕당]]을 복구했으나 이미 격화된 당쟁은 상대당의 존립 자체를 부정해버리는 일당독재화의 풍토로 이어졌다'''. 결국 [[정조(조선)|정조]] 개인에 절대적으로 균형이 맡겨진 준론 탕평은 [[정조(조선)|정조]] 말년으로 갈수록 균열을 드러냈으며, [[정조(조선)|정조]]는 말년에 건강이 매우 약화되고 훗날 어린 [[순조]]가 즉위하면 벽파가 드세면서 자신이 내세운 [[탕평책|탕평]]이 무너질까봐 결국 아예 자신의 철학을 부정해버리고 [[김조순]]을 위시로 한 [[신 안동 김씨|안동 김씨]] 세력에게 힘을 실어주어 [[세도정치|세도 정치]]의 포문을 직접 열어 버렸다. 그리고 전술하였듯이 정순왕후는 [[정조(조선)|정조]]의 뜻을 존중하여 자신의 정치 성향인 벽파와 대립하는 [[시파]]인 [[김조순]]을 국구(= 왕의 장인어른)로 삼았다. 결국 정순왕후가 [[정조(조선)|정조]]의 정책을 부정해서 [[조선]]의 몰락이 왔다던 과거 대중적 인식은 완벽한 거짓, 그리고 정순왕후가 [[정조(조선)|정조]]의 정책을 따랐으니 [[세도정치|세도 정치]]에 책임이 있다는 주장도 어불성설이다. 다만, [[정조(조선)|정조]]조 대까지 있었던 [[남인]]-[[시파]] 계열을 꽤 날려버린 것도 정순왕후의 책임이 맞긴 하다. 정순왕후의 정치기조는 [[정조(조선)|정조]]의 기조+ 본인 입맛 추가(당파색) 정도로 보는 것이 맞다. 실제로 정순왕후 대까지는 요직에 등용되었던 인물을 보면 [[남인]]을 날려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온건한 [[소론]]-[[시파]] 계열들이 그대로 등용되어있긴 했었다. 최소한의 다양성은 안 잃었다는 얘기. 정말 문제가 터진 것은 정순왕후가 물러나면서부터다. 이렇게 최소한으로 유지되던 균형을 [[신 안동 김씨|안동 김씨]] 세력이 정순왕후가 물러나자마자 정순왕후 중심으로 한 [[벽파]] 세력을 치면서 무너졌고, [[순조]]는 나이가 어려 정치를 모른다는 핑계로 이를 방치했고 이를 조율해줄 세력은 더이상 남아있지 않았다.[* 정순왕후 사망 이후 최고 왕실어른이 된 왕대비이자 적모인 [[효의왕후]]조차 어쩔수 없었던게 순조 본인이 폭정을 저지르는 것 자체는 아니기 때문에 친정을 멀쩡히 하고 있는 순조에게 뭐라고 할수도 없기 때문이다. 게다가 효의왕후 본인도 지나치게(?) 욕심이 없던탓에 그녀의 친가인 [[청풍 김씨]] 등 안동김씨 세력을 견제할 제 2 세력조차 나타나지 않았다.] 정순왕후 대에 벌어졌던 본인 당파색 추가의 부분이 [[정조(조선)|정조]] 시대 때까지만 해도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당파간 균형을 깨가는 과정 중에 하나이긴 했으므로 그에 대한 비판은 피해가기 힘들다. 하지만 [[조선]]을 망친 [[세도정치]]의 근본적인 원흉은 죽기 전 미봉책으로 외척인 [[신 안동 김씨|안동 김씨]]를 끌어들여 불균형의 단초를 제공한 [[정조(조선)|정조]]와 20년 넘게 재위에 올라있으면서 최소한의 균형잡기도 안한 [[순조]]라고 할 수 있는데, 겨우 3년 간의 [[수렴청정]]을 했을 뿐이며 재수렴을 하려고 해도 신하들의 거센 반발을 살 만큼 경직된 [[유교]] 사회에서 살았던 정순왕후에게 저 둘보다 [[세도정치]]의 책임을 더 진다는 것은 확실히 비이성적이고 과도한 책임묻기이다. 아니, 더 나아가 역사의 만약이란 없지만 정순왕후가 [[정조(조선)|정조]]와 동시에 죽었다면 [[세도정치]]가 더 빨리 왔을 수도 있다.[* 수렴청정은 적모이자 왕대비인 [[효의왕후]]도 할 수 있지만 효의왕후 본인은 정순왕후와 달리 아예 자신의 친가인 청풍 김씨를 끌어들이지 않다시피 할 정도로 욕심이 없고, 정조의 유지를 그대로 따랐기 때문에 역사적 방향은 그대로 흘렀을 것이다.] [[세도정치]]의 시대가 열린건 정순왕후 중심의 [[벽파]]가 무너지고 [[정조(조선)|정조]]가 등용했던 [[신 안동 김씨|안동 김씨]] 세력이 조정을 장악하면서이니 정순왕후가 없었으면 오히려 그 과정이 앞당겨졌을 수도 있다. 결국 이미 토양이 다 형성된 시기에 [[수렴청정]]을 한 것때문에 한 것 이상으로 욕을 먹은 것으로도 볼 수 있다. 애초에 [[영조|영]]/[[정조(조선)|정조]]가 유지했던 정치적 균형은 시스템 자체로 돌아갈 수 있는 균형이 아니라 그것을 조율해나갈 수 있는 군주 개인의 유능함이 전제된 균형이었다.[* 물론 [[조선]] 후기는 시스템 자체로 균형을 유지하기는 힘들었다. 조선 후기로 갈수록 소수의 가문, 지역, 학통 등이 권력을 장악해나감에 따라 이미 시스템만으로 균형을 유지할 수가 없게 되었다.] 피로 피를 씻는 붕당의 대결은 한참 이전인 [[선조(조선)|선조]] 시기 [[정여립의 난]]부터 씨가 보였다. 여기서 원한을 가진 [[대북]]은 [[광해군]]시기 [[봉산옥사]]와 [[계축옥사]]에 앞장서 다른 [[붕당]]을 박살내고 다녔고, [[인조반정]] 이후에는 [[서인]]이 정권을 잡아 [[북인|대북]]을 완전히 소멸시킨다. [[광해군]] 시기에 다들 질려버렸는지, [[인조반정]] 때 [[북인|대북]]을 완전히 소멸시킨 후에는 붕당 정치는 최대한 유혈사태를 피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으며, 얼마든지 유혈사태가 벌어질 수 있었던 [[예송논쟁]]이 상당히 평화롭게 끝난 것만 보아도 이런 분위기를 알 수 있다. [[선조(조선)|선조]]가 왕권 강화 목적으로 지른 피튀기는 붕당 대립이 인조 이후에는 그럭저럭 진화되는 것처럼 보였다. 하지만 [[숙종(조선)|숙종]]은 [[환국(조선)|환국]]을 일삼으며 또 붕당 정치에 유혈사태가 마구잡이로 벌어지기 시작했다. 최소한 [[붕당]]의 몰락과 [[세도정치]]의 등장이라는 부분에서는 정순왕후보다는 [[숙종(조선)|숙종]]이 더 비판을 받아야 하고, 재위 기간이 엄청나게 길어 [[붕당 정치]] 폐단을 교정할 기회가 많았던 [[영조]]가 제일 크게 비판을 받아야 한다. 정순왕후 대에는 하나의 외척이 독점적으로 권력을 휘두르지는 못하고 균형이 유지됐던 것을 보면, 최소한의 중도는 지키면서 균형적인 정치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. 실제로 당시 정순왕후가 정말로 형성된 대중적 이미지대로의 정치를 했다면, [[신 안동 김씨|안동 김씨]]가 아닌 [[경주 김씨]]가 조정을 다 장악하고[* 물론 정순왕후가 [[경주 김씨]]를 등용하긴 했다. 외척 정치 기조 자체를 강화시켰다는 비판이 있는데 이건 일리가 있는 비판이다. 물론 이 부분도 [[영조|영]]/[[정조(조선)|정조]]도 외척을 꽤 써먹었으니 정순왕후 혼자 독박쓰기에는 억울한 면모도 있다.] [[벽파]] 일변도로만 되어있어야 할 것이다. 하지만 당시 인사이동을 보면 [[순조]]와 [[헌종(조선)|헌종]] 때에 비하면 훨씬 균형적이며 오히려 [[정조(조선)|정조]] 대의 인사에 가깝다.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아버지인 [[정조(조선)|정조]]에게 물려받은 [[조선/왕사|왕권]]이 약하지도 않았고 그 왕권을 보존하기 위해, [[조선/왕실|왕실 어른]]이 이토록 균형을 맞춰주었는데도 [[조선/왕사|왕]]으로서 조정이 그대로 [[세도정치]]로 직행할 때까지 수십년간을 손 놓고 있었던 [[순조]]였다. 사실 [[신유박해]]가 임팩트가 커서 그렇지 [[세도정치]] 때랑 비교해보면 정순왕후 때까지는 인물 등용이 선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, 정순왕후는 [[조선/왕실|왕실]]의 큰어른으로서 수렴 너머에서도 [[조선/왕사|왕권]]을 탄탄하게 유지하며 혈연상 증손자이자 실제로 정치를 주도해야 할 왕인 [[순조]]에게 고스란히 물려주는 공로를 세웠다. 이런 정순왕후의 노력에도 [[세도정치]]의 발발을 그대로 방치한 [[순조]]야말로 비판을 피해가기 힘들다. 한마디로 정순왕후와 [[정조(조선)|정조]]의 관계, 그리고 종합적인 세도정치로의 진행은 1. 정순왕후는 [[정조(조선)|정조]]와 [[왕세손|세손]] 시절에는 협력관계였으며 재위 시절에는 당파적으로 대립한 부분이 있었으나, 그래도 전체적으로 사이가 크게 나쁘지는 않았고 [[정조(조선)|정조]] 역시 정순왕후를 [[조선/왕실|왕실 어른]]으로 대우했다. [[정조(조선)|정조]] 사후에도 [[정조(조선)|정조]]가 키워온 [[남인]]을 [[숙청]]하기도 했으나 그들을 유배보낼 뿐 무자비하게 처형하지 않았고, [[정조(조선)|정조]]가 주요하게 등용한 [[김조순]]을 비롯한 [[시파]]계열의 인사나 유지를 이어간 부분도 많으며 이를 계속 천명하기도 했다. 특히 [[정조(조선)|정조]]와의 사적인 관계는 남아있는 기록을 보면 괜찮았던 것으로 추정된다.[* 일득록에 따르면 [[정조(조선)|정조]]는 정순왕후를 친히 여기고 있었으며, 정순왕후 또한 [[정조(조선)|정조]]가 자신을 잘 공양했다는 기록이 있다. 확실히 어머니 [[혜경궁 홍씨|혜경궁]]보다 정치적 파트너로서는 훨씬 잘 통했던 것 같다.] 또한 3년의 [[수렴청정]] 동안 [[정조(조선)|정조]]의 유지를 가급적 [[순조]]의 친정 전까지, 그대로 이양해 주기 위해 발휘한 정순왕후의 정치력이 돋보인다. 2. [[세도정치]]의 토양은 권력을 지나치게 [[조선/왕사|군주]] 개인의 능력에 좌지우지되도록 시스템을 짜고, 외척을 입맛대로 써먹으며 정치를 했었던 [[숙종(조선)|숙종]]-[[영조]]-[[정조(조선)|정조]]를 거치며 지속적으로 강화되며 형성되었다. 3. 군주 개인의 유능함을 전제로 돌아가던 시스템은 [[순조|무능하고 우유부단한 군주]]가 [[조선/왕사|권좌]]에 올라 세월을 보내면서 무력화되었고, 이로 인해 [[정조(조선)|정조]]와 정순왕후가 열심히 맞추었던 조정 내 세력 간의 균형 또한 무너지면서 '''[[세도정치]]'''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. "결국 선왕들이 입맛대로 키워놓은 외척 세력이 [[순조|무력한 왕]]을 만나 마침내 전체 시스템을 장악하면서 [[세도정치]]가 완전히 자리잡았다.''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